조선시대는 유교를 기반으로 한 윤리 이념에 의해서 사회적으로 문란함을 강압하기 시작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그런 현상이 극심해져서 고려 시대와 같은 남녀 사이의 관계를 찾아보기 어려워지게 된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이라는 표현은 그 좋은 예이다.
남녀가 7세가 되면 같이 앉을 수 없다는 것은, 남녀의 만남 자체를 극도로 자제시키고자 한 사회적인 통념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중·후기로 내려오면서 사회적으로 음담패설이 유행하고, 어느 시대보다 성과 관련된 기록이
많이 전해지게 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중종 12년(1517) 조에 보면 남근을 깎아 바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각사(各司) 안에 모두 신을 설치하여 제사하는 풍습이 있는데, 이를 부근이라 하였으며,
행해온 지 이미 오래이므로 능히 혁파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헌부(憲府)가 먼저 지전(紙錢)을 불사르고, 각사에 관문(關文)을 보내어
모두 불사르게 하여 그 제사를 금하니, 쾌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
또 양현고안에 부근의 제사를 지낸 일이 있는데, 대비(大妃)가 내수사(內需司)에게
양현고의 부근신에 양근신물(陽根神物)을 바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사직(社稷)을 모시는 제의를 각 지방에서 행했는데, 사직(社稷)은 농경사회에서 모시는 신으로,
토지신(土地神)인 사신(社神)과 오곡신(五穀神)인 직신(稷神)을 합쳐 말하는 것이다.
이때 붉은 칠을 하고 푸른 글씨를 쓴 목제 남근을 바쳤던 것이다.
이를 부근(付根)이라 하고, 제의가 이루어지는 당을 부근당(付根堂)이라 하였다.
‘부근’이란 명칭은 부군(府君, 付君)으로 기록되기도 하지만, 남근과 같은 의미로 파악된다.
이와 같은 풍속은 조선 후기와 일제시대에도 계속되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부군당과 관련하여 민간과
궁중에서 신앙 되었고, 목제 남근을 당 안에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밖에도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 일본인 민속학자 무라야마 지준의 『조선의 무격(朝鮮の巫覡)』
등에서도 부근에 대한 기록이 있어 남성 성기를 숭배하는 신앙이 과거에서부터
계속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불교에서도 남근을 깎는 풍속이 있었다.
속리산 법주사에서는 해마다 설날에 불교신자들이 목제 남근을 깎아
신당에 봉납하는 ‘송이(松耳)놀이’가 전해진다.
여기에서 송이는 남근을 의미하는 불교적인 은어이다.
이 풍속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보은현사묘조(報恩縣詞廟條)’와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에
이와 관련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불교에서도 남근을 깎아 바치는 것은 남근을 쾌락적인 성의 의미가 아니라 생산을 가져다주는 존재로서 숭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의례적인 모습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성과 관련한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유행했다.
성에 대한 이야기는 첫날밤을 치르는 부부, 조혼 제도로 인해 성행위를 알지 못하는 부부의 이야기 등으로
나타나는데, 성에 대한 유쾌함과 함께 성교육의 역할도 했었다.
또한 판소리나 민요에서도 성적인 속성들이 많이 드러나는데, 판소리에서는 <춘향가>와
<변강쇠가>가 대표적이다.
<춘향가>에서는 이몽룡과 춘향이의 첫날밤을 치를 때의 대목에서 다양한 성행위들이 묘사된다.
또한 <변강쇠가>에서도 남녀 간의 정사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매우 노골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강한영의 『신재효(申在孝) 판소리 사설(辭說) 여섯마당집』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적에 강쇠놈은, 장승 패어 덥게 때고, 그날 밤을 자고 깨니, 아무 탈이 없었구나.
제 계집 두 다리를, 양편으로 딱 벌리고, 오목한 그 구멍을, 기웃이 굽어보며,
「밖은 검고 안은 붉고, 정녕한 부엌이쇠, 빡금빡금하는 것은 조왕동증 정녕 났제.」
제 器物 보이면서
「불끈 불끈 하난 수가, 木神 動症 정녕 났제. 가난한 살림살이, 굿하고 경 읽것나.
목신하고 조왕하고, 사화를 붙여 보세.」
아적밥 끼니 에워, 한 판을 질끈 하고, 장담을 실컷 하여.
또한 민요에서도 모내기나 김매기를 할 때 성적인 내용이 담긴 노래들이 많이 불렸다.
여그도 꽂고 저그도 꽂고 / 쥔네 마누래 개허리도 꽂고 어서 바삐 돌아가서
/ 우는 애기 젖도 주고 / 반달 품안에 잠자러 가세
모를 심을 때 부르는 이 노래는 모를 꽂는 작업과 성행위의 상황을 절묘하게 연결하고 있다.
특히 남성 중심의 김매기 과정 중에서 표현들이 노골적으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 주로 표현되는 대상은 젖가슴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과일 등을
이용한 은유적 표현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연꽃과 함박꽃 같은 꽃 유형, 은빛과 분통과 같은 색상 표현 등이 그러하다.
이외에도 적삼이나 안고름 밑으로 표현하는 예도 있다.
이와 달리 속옷이나 고쟁이 등을 제시하여 성기를 암시하는 듯한 표현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게 김매기나 모내기 때 남녀 간의 성적 관계에 대한 노래를 부르는 것은 노동의 고통을 잊기 위한 것이자
동시에 농작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적 묘사의 양면성은 성에 대한 다양한 문화들에서 동일하게 찾을 수 있다.
따라서 한국 문화 속에서 성은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의도된 장치로서 사용되는 것이며, 동시에 웃음과 흥미를
주기 위한 소재인 것이다.
※ 자료출처 : 중앙대 민속학과 김종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