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후안무치의 발언이 아닐 수 없죠.
피옴비 감옥에 갇힌 그는 탈옥을 결심하고 탈출구를 만들어 1756년 탈옥에 성공했습니다.
탈옥한 그는 1757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옛 친구의 도움으로
재정 전문가로 활약하며 루이 15세에게 복권도입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복권 사업소 5곳을 운영하며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였고 재정적으로 넉넉해지자
또다시 여자들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던 중 실크프린팅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들과의 관계로 돈을 탕진하기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고 이를 갚지 못할 상황이 닥쳐 또다시 도망가기에 이릅니다.
이때부터 그는 "생갈의 기사"라는 가명을 썼습니다.
1763년 금욕적인 영국을 방문한 그는 문란했던 프랑스에서와 달리 푸대접을 받았고
한 매춘부에게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되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프리드리히대왕을 만나기도 했고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에 머물면서도 여자들을 건드리다 뿔난 러시아 남자들이
"러시아에선 남자가 카사노바를 죽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여
카사노바는 폴란드와 스페인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러다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그가 스페인에서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베네치아의 고위 인사들의 눈에 들면서
결국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출판업으로 먹고살던 그는 1783년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라는 책에서
자신의 친아버지가 미켈레 그리마니이며 그리마니의 아들 카를로 그리마니는
세바스티안 지우스타니의 사생아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카를로 그리마니는 분노했고 베네치아의 여론이 악화되자
카사노바는 또다시 줄행랑을 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도망친 카사노바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보헤미아의 발트슈타인 백작 소유의 둑스 성에서 남은 생애를 마무리합니다.
젊었을 때 문란한 생활을 한 탓인지 40대 중반에 발기부전 등을 앓아
성기능을 상실하고 쓸쓸하게 살다가 1798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유언은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기독교도로서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카사노바의 여성편력을 보면 젊었을 때 엄청 행복하게 살았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편력과 빚 때문에 여러 번 감옥에 들락거리고 추방을 당하기도 한 인생입니다.
취미가 풍부한 재사로서 파리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말로 쓴 [회상록 Mémoires, 12권, 1826∼1838]은
초인간적 엽색(獵色) 생활기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18세기 유럽의 사회·풍속을 아는데 귀중한 기록이 되기도 합니다.
5부로 된 공상소설 [20일 이야기 Icosameron, 1888]는
쥘베른의 [지저여행]의 선구적 작품이라 일컬어집니다.
카사노바의 여성편력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유부녀, 귀족, 수녀와 심지어는 친딸에게까지 추파를 던졌다고 전해집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거대한 성기의 보유자였다고 하는데요.
그가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릴 수 있었던 이유는
성기의 크기가 아니라 여성을 특별하게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