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기능향상

밤의 황제 카사노바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살아왔음을 고백한다.

[카사노바의 저서 《나의 인생 이야기(Histoire de ma vie)》 서문]



이탈리아 출신 문학자이자 바람둥이의 대명사

자코모 지롤라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o Casanova)는

대부분 많은 사람들이 바람둥이, 난봉꾼, 우리나라 사람으로 치면

변강쇠 정도로 잘 알고 있습니다.

스페인계 이탈리아인으로 직업은 성직자, 모험가, 시인, 소설가로 자칭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잘난 바람둥이의 대표격이자 난봉꾼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그에 더해져 불법 매춘과 강간을 즐기고 사기행각까지 저지른

악랄한 범죄자에 가깝다고 합니다.

픽업아티스트 같은 사기꾼들이 스스로 언급하듯 그런 바닥의 선조격이 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세기 중후반에 잠깐 재평가가 시도된 적 있었으나 난봉꾼 정도를 넘어 기본적인

자질조차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정황만 더 드러나면서 재평가가

취소되기도 했다 합니다.

카사노바는 베네치아공화국에서 희극배우를 하는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의 면면을 보면 괜찮은 집안이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유럽에서 꽤 이름난

성악가였고 동생 중 한 명은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화가로 성공합니다.

보여지는 초상화는 바로 카사노바의 동생인 프란체스코 카사노바가 그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6남매를 남기고 36살에 요절해서 할머니 손에 키워지다

할머니도 돌아가시면서 귀족 미켈레 그리마니에게 맡겨졌습니다.

15살에 성직자 알비세 말리피에로의 도움으로 1740년 2월 성직에 입문,

베네치아의 대주교로부터 신품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파도바 대학에 다니며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히브리어, 스페인어, 영어를 

배우고 고전문학, 신학, 법학, 자연과학, 예능 등 다양한 지식을 섭렵하고

춤, 펜싱, 승마 등 교양과 카드게임 등의 사교술을 익혔는데 이때 배운 것들은

훗날 엘리트들과의 교류에 유용하게 사용됩니다.

1742년 17세의 나이로 파도바 대학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성직자 신분에도

여신도들을 꼬시는 등 일탈행위를 일삼았고 그를 둘러싼 구설수들이 나오자

교회에서 그를 쫓아냈습니다.

그러면서 바람둥이 행각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으로 건너갔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화려한 언변과 재능으로

여자들을 유혹했는데, 이때 베네치아 귀족이자 상원의원이었던

마테오 조반니 브라가딘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더 거칠 것이 없어졌습니다.

가문빨 돈빨로 카사노바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여자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카사노바 자신의 회고록에 의하면 122명의 여자들을 안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베네치아에서 난교 파티를 열었는데 이때 수녀까지 끌어들였다가

카사노바를 탐탁지 않게 여긴 귀족층에서 그를

"이성을 유혹하는 이단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체포했고

5년형을 선고받고 1년간 두칼레 궁전에 있는 피옴비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이때 일을 회고하며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는 타인에게 잘못한 적이 없다.

사회 안정을 위협한 적도 없고 남의 일에 간섭한 일도 없다.

사적인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단 한 가지 이유가 있다면 아마도 종교 재판관의 애인과 자주 만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야말로 후안무치의 발언이 아닐 수 없죠.

피옴비 감옥에 갇힌 그는 탈옥을 결심하고 탈출구를 만들어 1756년 탈옥에 성공했습니다.

탈옥한 그는 1757년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옛 친구의 도움으로

재정 전문가로 활약하며 루이 15세에게 복권도입을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복권 사업소 5곳을 운영하며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였고 재정적으로 넉넉해지자

또다시 여자들을 자신의 침실로 불러들였습니다.

그러던 중 실크프린팅 사업에 실패하고 여자들과의 관계로 돈을 탕진하기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렸고 이를 갚지 못할 상황이 닥쳐 또다시 도망가기에 이릅니다.

이때부터 그는 "생갈의 기사"라는 가명을 썼습니다.

1763년 금욕적인 영국을 방문한 그는 문란했던 프랑스에서와 달리 푸대접을 받았고

한 매춘부에게 사기를 당해 빈털터리가 되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이후 그는 베를린으로 가서 프리드리히대왕을 만나기도 했고 러시아 제국의

예카테리나 2세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러시아에 머물면서도 여자들을 건드리다 뿔난 러시아 남자들이

"러시아에선 남자가 카사노바를 죽입니다!"라는 반응을 보여

카사노바는 폴란드와 스페인을 전전하게 됩니다.

그러다 고향인 이탈리아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그가 스페인에서 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베네치아의 고위 인사들의 눈에 들면서

결국 이탈리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출판업으로 먹고살던 그는 1783년 [사랑도 싫고, 여자도 싫다]라는 책에서

자신의 친아버지가 미켈레 그리마니이며 그리마니의 아들 카를로 그리마니는

세바스티안 지우스타니의 사생아라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카를로 그리마니는 분노했고 베네치아의 여론이 악화되자

카사노바는 또다시 줄행랑을 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도망친 카사노바는 체코의 프라하에서 2시간 정도 떨어진

보헤미아의 발트슈타인 백작 소유의 둑스 성에서 남은 생애를 마무리합니다.

젊었을 때 문란한 생활을 한 탓인지 40대 중반에 발기부전 등을 앓아

성기능을 상실하고 쓸쓸하게 살다가 1798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마지막 유언은 "나는 철학자로 살았고 기독교도로서 죽는다"라고 했습니다.

카사노바의 여성편력을 보면 젊었을 때 엄청 행복하게 살았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편력과 빚 때문에 여러 번 감옥에 들락거리고 추방을 당하기도 한 인생입니다.

취미가 풍부한 재사로서 파리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총애를 받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말로 쓴 [회상록 Mémoires, 12권, 1826∼1838]은

초인간적 엽색(獵色) 생활기로 유명합니다.

이것은 18세기 유럽의 사회·풍속을 아는데 귀중한 기록이 되기도 합니다.

5부로 된 공상소설 [20일 이야기 Icosameron, 1888]는

쥘베른의 [지저여행]의 선구적 작품이라 일컬어집니다.

카사노바의 여성편력은 대상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유부녀, 귀족, 수녀와 심지어는 친딸에게까지 추파를 던졌다고 전해집니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거대한 성기의 보유자였다고 하는데요.

그가 수많은 여성과 염문을 뿌릴 수 있었던 이유는

성기의 크기가 아니라 여성을 특별하게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였다고 합니다.